내가 인천유나이티드 팬으로서 자부하는 여러 특이점 중 하나는 팬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원정 버스 시스템이다. 외부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않는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구조가 특징이다. 구단으로부터 어떤 형태로든 직간접적인 도움을 받는 것이 더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의견이 인천팬들 사이에서 이미 수년 전부터 제기되었고, 2016년부터 파랑검정 현장팀의 주도로 사비를 모아 자체 원정 버스를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구단과 팬들이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건강하고 발전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일부 소모임들은 구단에서 으레 제공하는 경기장 내 창고 공간조차 사용하지 않기로 했는데, 경기장 바깥에 별도의 공간을 꾸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
2라운드 상대는 경남,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주중에 있었던 ACL 조별리그 1차전을 보고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력적으로는 우리가 유리하기 때문에 비기기만 해도 선방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런데 전반에만 2골을 몰아치고 이겨버린 것이다. 남준재는 첫 골을 성공시키고 주장 완장에 입을 맞추고 활을 쏘는 아름다운 세레모니를 선보였다. 우리는 열광하며 답가를 보냈다. 남준재, 넌 이 씬의 주인공이다. 후반에 남준재가 조던 머치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잠시 의식을 잃는 사고가 있었다. 남준재가 병원으로 이송되고 난 후, 조던 머치가 공을 잡을 때마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는 어마어마한 야유가 쏟아졌다. 나를 비롯한 파도의 구성원들은 2개국어로 욕을 했다. ‘화가 나도 예쁘게 말해야지’는 개소리다. 야유는..
무언가가 기다려지는 인생은 그렇지 않은 인생보다 조금 더 행복한 것 같다. 2019시즌부터 인천유나이티드를 응원하는 모든 팬들은 파랑검정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한다. 2016시즌부터 통합 현장팀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파랑검정을 인천팬 전체를 아우르는 의미로 확대했다. 인천유나이티드를 응원한다면 당신은 파랑검정이다. 그런 의미를 담은 퍼포먼스를 준비했고, 역대 최다 관중과 함께 퍼포먼스를 완성했다. 기대치가 너무 높았을까, 경기는 생각보다 지루했다. 핸들링 반칙으로 PK를 얻어 겨우 동점을 만들었지만, 역전하기엔 한참 모자른 경기력이었다. 영입만으로도 화제를 모은 베트남 축구 스타 콩프엉이 교체 명단에 포함되었지만 끝내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일부 베트남 팬들은 SNS 상에서 불만을 표출했다. 베트남..
우리의 목표가 오로지 잔류뿐이라면 그건 너무 시시하지 않나. 분명히 말했지만 시나리오는 우리가 쓴다. 자고로 뛰어난 작가란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파도의 구성원 알감자는 후반 45분 내내 타구장 소식을 확인했다. 나도 응원하는 시늉만 했지 온통 관심은 그쪽에 쏠려 있었다. 마침내 머나먼 상주에서 박용지가 골을 넣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순간 거짓말 안하고 문선민의 결승골만큼이나 기뻤다. 2018 시즌 마지막 홈경기이기도 했고 잔류 여부가 결정되는 중요한 경기라서 9천명이 넘는 유료 관중이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무료 관중까지 대략 만이천명의 관중이 함께 했는데 오랜만에 인파에 부대껴 축구를 보는 즐거운 경험을 했다. 원래 축구장은 부대끼는 맛이지. 주변인들에게 내가 인천유나이티..
경인고속도로를 막 빠져 나왔을 무렵 KT 화재로 인해 마포구 일대 통신이 마비되었다는 속보를 접했다. 마치 재난 영화의 첫 장면 같았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저주 받은 땅 마포구로 굳이 찾아가는 등장인물이 된 것 같은 기분 말이다. 실제로 저주 받아 마땅한 곳이 마포구에 있긴 하다만. 축구장에서 자행되는 모든 차별과 폭력에 반대하지만 지워 버리고 싶은 존재들은 있다. 연고이전 클럽과 관련된 모든 존재들이 그러하다. 연고이전의 적극적인 가담자든 소극적인 방관자든 어쨌든 공범이라고 본다. 90분 동안 어떤 신묘한 힘이 우리 골문을 지켜주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벌레들이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머저리 같은 심판이 아무리 흐름을 바꾸려 해도, 신묘한 힘 덕분인지 계속해서 공이 빗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
나에게 있어서 축구장은 일탈의 공간이 아니라 일상의 공간이다. 일상 속에서 말하지 않는 의견은 존재하지 않는 의견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발언하는 행위는 중요하다. 나는 축구장을 일종의 광장이라 여기고 축구장의 언어로 발언하고자 한다. 플래그를 제작했다. 오프사이드 기(旗) 패턴을 배경으로 OFFSIDE GIRLS라는 문구를 넣었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동명의 영화 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영화 는 이란과 바레인의 월드컵 최종예선 경기를 보기 위해 남장을 하고 아자디 경기장에 몰래 입장을 시도하는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영화에서 오프사이드란 금지된 선을 넘는 행위를 상징한다. 그런데 오프사이드 반칙을 저지르는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이란의 여성들인가? 아니면 이란이라는 국가 권력인가? 여성을 억압하고 ..
인천유나이티드가 비상이 걸릴 때마다 긴급 소집하는 특별 원정대가 바로 ‘비상 원정대’라고, 우리끼리 주고받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2005년 리그 준우승의 상징인 비상(飛上)보다 강등 위기의 비상(emergency)이 먼저 떠오르는 현실이라니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싶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이번 비상 원정대는 시간(토요일 오후 2시), 비용(구단에서 제공한 무료 버스), 거리(비교적 가까운 춘천)의 삼박자가 잘 맞아 떨어져 버스 8대 규모의 원정단이 꾸려졌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요소 중에서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이정도의 인원이 함께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시간과 비용과 거리에 상관없이 인천유나이티드를 응원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누군가는 아무런 의미..
골대 뒤에서는 많은 것들이 암묵적인 약속으로 정해져 있는데 특히 응원 구역에 관해서는 더욱 엄격한 잣대가 적용된다. 인천유나이티드 골대 뒤는 주로 소모임별로 응원 구역이 정해져 있다. (다른 클럽의 골대 뒤는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그래서 어떤 소모임의 자리를 침범하거나 원래의 자리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드물게도 나와 함께 하는 파도(PADO:NEW WAVE)라는 그룹은 응원 구역을 때때로 달리 하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다. 응원 구역에 있어서 파도는 구성원들의 선택을 존중한다. 파도의 구성원 K는 E석에서 아기와 함께 관람하는가 하면, L은 S석 난간에 매달려 강도 높은 응원에 임한다. 어디에 있건 어떤 모습을 했건 우리는 파도라는 이름으로 함께 한다. 파도의 구성원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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